“18세기 영국사회 개혁한 웨슬리 신앙 유산에서 21세기 한국교회 나아갈 길 찾아”
‘존 웨슬리 저널’ 전 5권 1,200세트 한정판 출간
이지희 기자 (jsowuen@gmail.com)
존 웨슬리 저널 출간 간담회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동성 신앙과지성사 편집주간, 한영태 전 서울신대 총장, 최병천 신앙과지성사 대표, 김영선 웨슬리신학연구소 소장, 박동찬 일산광림교회 목사. 박동찬 목사는 “135년 만에 번역돼 나온 것이 늦은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지금이라도 출판되어 너무 뜻깊다”라고 말했다. ⓒ이지희 기자
18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자이자 위대한 전도자, 신학자인 존 웨슬리는 1791년 3월 88세의 나이로 소천하기 전까지 평생 일기를 기록했다. 이러한 습관은 1735년 10월 14일부터 1790년 10월 24일까지 무려 55년간이나 계속됐다. 생전 웨슬리는 첫 설교집(1746)보다 6년이나 먼저 그의 일기를 기초로 목회 여정을 정리한 저널(1740)을 출판하여 세상에 알렸다.
존 웨슬리 저널
오늘날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순복음, 나사렛 교단이 신학적 뿌리를 두고 있는 존 웨슬리의 영성과 신학이 어떻게 그의 일생에 녹아 들어가 18세기 영국교회와 영국사회를 개혁해나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존 웨슬리 저널'(신앙과지성사)이 번역 출간됐다. 부분 발췌한 번역본이 아닌 전 내용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처음이며,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전 내용이 번역된 것은 세계 최초다.
원저는 웨슬리가 직접 기록한 저널만을 편집하여 수록한 토마스 잭슨의 ‘존 웨슬리 저널'(원제 The Journal of the Rev. John Wesley: Sometime Fellow of the Lincoln College, Oxford. London: Wesleyan Methodist Book Room, 1872)이다. 책 출간을 위해 5년간 웨슬리신학연구소 김영선 교수를 중심으로 23명의 웨슬리 학자가 번역에 참여하고, 김선도 전 감독회장이 간행위원장, 조종남 박사가 감수위원장을 맡아 섬겼다. 또한 일산광림교회(박동찬 목사)의 후원으로 총 약 3,0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5권 세트)의 역작이 완성됐다.
29일 서울 중구의 모처에서 ‘존 웨슬리 저널’ 간담회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출판사 신앙과지성사 최병천 대표, 김동성 편집주간, 번역과 감수 등으로 참여한 웨슬리신학연구소 소장 김영선 협성대 명예교수, 한영태 전 서울신대 총장, 출판을 물심양면 후원한 박동찬 일산광림교회 목사가 참여했다.
존 웨슬리 저널 출간 간담회
▲김영선 소장(왼쪽)은 “웨슬리 저널은 복음전도자, 설교자, 신학자, 목회자, 교육자로서의 웨슬리의 모습은 물론 메소디즘이 무엇인지를 가장 선명히 보여주는 유일한 저작”이라고 말했다. ⓒ이지희 기자
김영선 소장은 이날 “웨슬리 신학이 웨슬리 설교에 근간을 두고 있다면, 웨슬리 목회는 웨슬리 저널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며 “최근에 이르러서 웨슬리 신학에 대한 관심이 웨슬리 저널 연구로 옮겨가고 있다”며 출간 계기를 밝혔다. 김 소장은 “저널은 복음전도자, 설교자, 신학자, 목회자, 교육자로서의 웨슬리의 모습은 물론 메소디즘(Methodism)이 무엇인지를 가장 선명히 보여주는 유일한 저작”이라며 “저널에는 웨슬리의 목회 여정의 온 파노라마가 일생에 걸쳐 펼쳐져 있다. 곧 저널은 웨슬리 스스로 기록한 ‘자전문학’이며 당시 복음운동을 통해 나타난 사실을 생생하게 목도하고 기록한 ‘보고문학’이며 복음 여행을 통해 얻게 된 지식과 정보들을 기록한 ‘기행문학'”이라고 소개했다.
실제 웨슬리 저널에는 웨슬리의 독서 목록,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및 편지 내용과 평가, 자신의 영적 상태 점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 등 개인적 관심부터 그날의 설교 장소와 설교 본문 및 제목, 청중의 규모와 반응, 집회에서 나타난 다양한 영적 현상, 집회에서 공격받은 이야기 등 목회 행적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이와 함께 18세기 영국 사회상과 미국 조지아,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면서 경험한 풍물, 장례, 법정 소송, 사기꾼들이 목회자 모습으로 설교하고 돈을 거두어가는 사건 등도 확인할 수 있다.
존 웨슬리 저널 출간 간담회
▲한영태 박사(가운데)는 “웨슬리의 신학과 삶을 그의 저널에 집대성했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지희 기자
한영태 박사는 “웨슬리는 옥스퍼드 교수로서 책을 쓸 수 있었겠지만, 가슴에 뜨거운 불이 붙는 체험을 한 후 학교에서 강의만 할 수 없어 바로 전도하러 나간 분”이라며 “웨슬리는 설교로 자신의 신학을 정리했는데, 신학을 실제로 전하고 삶을 살았던 산 신학(living theology)을 목회 현장에 반영한 것은 이 저널에 다 들어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웨슬리의 신학과 삶을 그의 저널에 집대성했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김영선 소장은 편찬사를 통해 웨슬리 저널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을 5가지 꼽았다. 먼저 ①웨슬리의 신학은 그의 일생을 통해 발전한 것으로, 다양한 사건과 만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수립하고 성결을 목표로 하는 신학에 도달하기까지 간절한 고민과 염려, 기도 등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그다음 ②메소디스트(Methodist)의 생생한 부흥의 현장으로, 웨슬리가 방문하고 설교하는 곳에서 회심, 경련, 쓰러짐, 신유 등과 같은 많은 영적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③복음운동을 통해 영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고 개혁되어 가는지 살펴볼 수 있으며 ④18세기의 영국의 삶의 정황을 담아내 웨슬리가 여행한 지역의 당시 사회상, 문화상, 경제상, 정치상과 민족성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⑤영국 사회를 개혁하는 대안 공동체로서의 메소디스트 신도회 사역에 대한 다양한 실상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존 웨슬리 저널
▲존 웨슬리 저널 전 5권 ⓒ신앙과지성사
이날 박동찬 목사는 “웨슬리의 솔직한 마음, 고뇌, 목회 경험 등 모든 것이 기록된 이 저널은 135년 전 이 땅에 들어온 웨슬리 신학의 유산과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자료일 것”이라며 “135년 만에 번역돼 나온 것이 늦은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지금이라도 출판되어 너무 뜻깊다”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특히 “1974년 로잔대회에서 종족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모델로 언급된 것이 존 웨슬리였다. 18세기 영국사회가 웨슬리 운동으로 완전히 변화됐기 때문”이라며 “COVID19, 뉴노멀 시대에 웨슬리를 다시 제대로 연구하고 본질로 돌아간다면 한국교회도 소망이 있고 한국도 변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영선 소장도 “이 책은 감리교의 보물이기도 하지만 한국교회에도 큰 보물로, 한국교회 목회자와 신학생은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라며 “비록 1700년대 목회자의 여정을 보지만, 오늘의 시대에 환원시켜 우리의 목회와 교육, 문화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이 한국교회의 조그만 밀알이 되면 좋겠다”고 기대를 전했다. 최병천 대표는 “존 웨슬리의 삶이 녹아 있는 책의 내용도 기념비적일 뿐 아니라 책을 만든 것도 기념비적인 일로, 이 일에 기여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존 웨슬리 저널’은 1,200세트 한정판으로 발간됐으며, 이미 약 50% 정도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저널 중 발췌한 내용.(문의 02-335-6579)
올더스게이트에 있는 신도회에 갔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동안,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곧 이 비천한 내 죄까지도 제거하셨고 기자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1738년 5월 24일-
숙소로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폭도들이 문을 부수고 숙소로 들어와
나를 질질 끌어내 큰 연못으로 데리고 갔다.
그 연못의 수심은 대략 10~12피트 정도 되었다.
연못 앞에서 네 사람이 각각 나의 팔다리를 붙잡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약간 오싹했으나 그러한 감정은 금세 사라져 버리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내가 죽고 사는 것을 상관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앞뒤로 두세 번 흔들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멀리
나를 물속으로 던져 버렸다. 물속에 던져지자
나의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1752년 4월 3일-
내린 비는 내가 유럽에서 거의 보지 못하였다.
주요 도로 중의 하나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을 만한 물줄기가 흘렀다.
그러나 스완지에서 6마일 떨어진 뉴톤에서 정오에 설교하기로 약속했으므로
청중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약속을 깨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이 틀렸다.
마을에 어떤 집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급히 창고가 설교 장소로 준비되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셔서,
그들의 마음속에 은혜의 비를 내리셨다.
-1758년 8월 28일-
가장 성실한 사람들 중
서로에 대한 깊은 편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서로 대면함으로써 그 편견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논쟁과 설득을 병행했지만, 그 모든 것이 허사였다.
이성적인 노력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함을 인지하고 우리는 기도에 의존했다.
갑자기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했다. 분노했던 양편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서로의 목을 끌어안았다.
모든 분노와 편견이 사라졌고, 그들은 전처럼 가슴으로 연합되었다.
-1767년 6월 26일-
오늘로 85세가 된다.
일천 가지의 영적, 육적 축복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전처럼 명석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전처럼 빠르게 걷거나 달리지 못한다.
나의 시력이 약하여졌다. 왼쪽 눈은 거의 볼 수 없어서 읽기가 매우 힘들다.
오른 눈언저리 통증을 매일 느끼고 있으며, 오른쪽 관자놀이도 그러하다.
또한 발목이 삔 것과 류머티즘으로 인하여 오른쪽 어깨와 팔도 통증이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 40년, 60년 동안 읽고 들은 바에 대한 것은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여행이나 설교에 있어서도 연약함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설교 원고 작성에서도 기력이 쇠하여진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설교를 손쉽고 바르게 작성하고 있다.
-1788년 6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