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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Holy Place Pilgrim

영국 런던 웨슬리 생가 및 채플 방문 사진

다음은 장재웅 목사가 2012년 2월 영국감리교 본부와 런던 웨슬리 생가및 채플을 방문시 찍은 사진들이다.

존 웨슬리 생가 올드 렉토리 (웹워쓰)

영문으로 ‘Epworth’라고 쓰는 이 지명이 읽으면 읽을수록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왤까?  초기한국감리교회사에 종종 등장하는 발음하기도 뻑뻑한 ‘엡웟청년회’때문이었을까. 선교사들의 권유로 탄생한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현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회)의 ‘엡웟’(Epworth)은 존 웨슬리의 출생지인 바로 이곳의 지명을 딴 것이 맞다.  그 뜻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남”이라하니 청년회의 이름으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엡워쓰에는 존 웨슬리의 생가이며, 아버지인 사무엘이 죽던 1735년까지 가족들이 살았던 올드 랙토리(Old Rectory)로 불리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다락방포함)의 목사관이 있다.  물론 지금은 웨슬리의 숨결을 찾는 방문객들을 맞는 박물관으로 바뀌어있다. 정문을 지나 1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웨슬리의 사진, 괘종시계, 부모의 초상화, 열쇠 등이 전시된 거실이 있다.  오른편으로 연결된 방은 현재 기념품 판매소로 쓰이고 있는데, 당시에는 어머니인 수산나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공부방이었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다보면 복도에 걸려있는 팔 벌려 한 폭은 됨직한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1907년 올드 랙토리를 전소시켰던 대형화재사건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첫 기억이 개인의 생애유형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리는 그 그림에서 웨슬리의 첫 기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존 웨슬리가 평생 스스로를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라고 여겼던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인생의 출발점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웹워쓰 목사관 화재사건

웹워쓰 목사관 화재사건을 그린 그림. 생가 2층 계단 복도에 걸려있는 그림이다 

1907년 2월 9일 수요일,  깊은 밤,  다섯 살 된  존 웨슬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자욱한 연기는 방안을 이미 독한 냄새로 채워가고 있었다. 목사관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불이야!”라는 소리에 놀라 일어난 그는 황급히 아내와 딸을 깨웠다. 하녀도 급히 육아실로 달려가 아이들을 집밖으로 대피시켰다. 그러나 웨슬리 가족은 아무도 존 웨슬리가 집안에 남겨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존 웨슬리는  “살려달라”  울부짖기 시작했고 이 외침은 사무엘에게 들렸다. 사무엘은 목사관으로 들어가려 시도했지만, 이미 불계단으로 변해있었다. 사무엘은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존 웨슬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존 웨슬리는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살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 있던 테이블(혹자는 궤짝)을 창가로 밀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밖에서 서성이던 한 사람이 웨슬리를 발견한다. 인간사다리를 만들자는 제안에 인간사다리를 만든 뒤 창문을 통해 존 웨슬리는 구출 되었고 그 순간 목사관 지붕은 폭삭 내려 않았다.  1753년, 웨슬리 나이 50세 때, 그는 의사로부터 죽음을 준비하라는 통보를 들을 정도로 깊은 병이 들었다.  존 웨슬리는 미리 자신의 비문을 준비하는데, 자신의 이름 다음에 ‘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로 뒷 말을 이어간다.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 존 웨슬리. 그에게 이 화재 사건이 어떤 의미 다가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화재 당시의 나무조각

자녀 양육의 장(場) 식당

올드 랙토리 1층에 있는 공부방 역할을 했던 식당

처음 올드 랙토리(Old Rectory) 앞에 섰을 때, 목사관치곤 예상보다 큰 게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웨슬리 가족이 자녀만 열아홉(이중 아홉 사망)의 대가족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 규모는 되었어야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수산나는 1690년 첫 자녀 사무엘(주니어)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출산했다. 그리고 이 자녀들 가운데서 요한 웨슬리(15번째)와 찰스 웨슬리(18번째)같은 세계적인 인물이 배출됐다.  수산나는 이 많은 자녀들을 바로 식당에서 훈련 시켰다. 7~8평쯤 돼 보이는 식당 이곳이 수산나의 자녀 양육의 장(場)이었다. 정갈한 베이지색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주전자가 걸려있는 벽난로가 보이고, 벽난로 양 옆으로는 채광이 잘되는 창문이 바깥 경치를 담아내고 있었다. 식당 한복판에 자리 잡은 식탁 위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금속제 접시와 주전자, 컵, 양념통, 포크와 나이프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좌측 먼 구석 쪽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와 밤색 장판으로 덮인 계단이 보였다. 이 장소는 단순히 식사만 했던 부엌이 아니었다. 잿더미가 된 사제관은 당시 4백 파운드의 공사비를 들여 1년 동안 재건축됐는데, 특히 수산나의 활동공간이었던 부엌은 식당뿐만 아니라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절반을 막아 기념품 판매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바로 이곳에서 수산나는 하루 6시간씩 규칙적으로 자녀들을 철저히 교육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이때 받은 교육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는 1732년 어머니에게  자신에게 사용했던 교육방법을 알려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수산나의 교육은 자녀 대에서 끝나지 않고, 홀리클럽, 나아가 존 웨슬리를 따르는 회원들의 규칙 속에 면면히 반영되어 흐르게 된다

4. 수산나의 교육방법과 내용

수산나는 엄격한 규율과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철저히 자녀를 양육했다. 아이가 태어 난지 석 달만 지나면 어김없이 그녀는 정한 시간에 요람을 흔들어 아기를 재우고, 깨우면서 규칙적으로 잠을 자도록 훈련했다. 말문이 트인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와 밤에 잠잘 때 꼭 주기도문을 외워야 했다. 또 주일이 보통 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도록 가르쳤다. 일 년에 한번씩  목사관에는 “알파벳잔캄” 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다섯 살을 맞은 자녀가 알파벳을 처음 배우는 날이었다. 이때부터 자녀들은 오전 9~12시, 오후 2~5시까지 매일 여섯 시간 이상 공부방인 주방에 모여 공부했다. 하루 만에 알파벳을 배운 자녀는 다음날부터 창세기를 보면서 철자법, 독법, 서법 등을 배우고, 산수, 문법, 역사, 지리도 차례로 익혀나갔다. 수산나의 교육방법 중 특별한것은 일주일을 단위로 매일 순서를 정해 아이들과 한 시간씩 대화를 나누는 개별상담이다. 그녀는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 놓고 요일별로 돌아가며 모든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상담하고 기도해 주는 신앙의 어머니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에 면담시간을 가졌는데, 이 은밀한 시간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경건의 훈련을 받았다. 수산나는 자녀들이 꼭 지켜야 할 여덟 가지 원칙 세칙을 정했는데 첫째, 잘못을 범했더라도 누구든지 솔직하게 자백하고 고칠 것을 약속하면 매를 맞지 않도록 한다. 둘째, 거짓말, 좀도둑질, 교회에서 또는 주일에 장난치는 일, 불순종, 말다툼 등의 죄 된 행위는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 넷째, 순종하는 행위의 표시는 모두 칭찬하고 그 동기의 공로에 따라 자주 상을 준다…. 일곱째,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수산나는 매를 통한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의지를 꺾는 순종의 소중함, 규칙생활을  자녀들에게 심어주려 노력했다

웨슬리가 회심했던 올더스게이트 거리

     

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런던 박물관 옆에 위치한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 지금은 그가 거듭남을 체험한 집회장소가 남아 있지 않고, 회심당일(1738년 5월 24일)의 일기를 적은 커다란 불꽃 모양의 동판이 이 곳이 웨슬리의 회심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다. 2003년 3백주년 기념으로 동판을 만든 것이다.  기념비 내용은 회심일의 일기이다. 정확한 회심위치에 대해서는 영국과 미국의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영국 학자들은 런던박물관 자리를 주장하고 있고 미국 학자들은 30m 정도 거리를 더 올라가 길가에 미국 드류대학교 신학대학교에서 1926년 8월에 기증한 명판을 설치했다.

 

1738년 5월 24일 (수)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 죤 웨슬리의 일기 –

 

촬스 웨슬리 회심 기념비

“하나님은 그의 일꾼을 묻으시지만 당신의 일은 계속하신다.” “God buries his Workmen, but carries on his work” 기념비 맨 꼭대기 책에 적혀 있다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공부하고 한때는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생이었던 찰스 웨슬리 목사를 기념하여 설교자로서 그는 탁월한 능력과 열정이 있었고 유능했으며, 많이 배웠으나 자만하지 않고 경건했으나 허식이 없었으며, 다른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의 아들이었지만, 자만하는 자와, 위선자와 경건치 못한 자에게는 우레의 아들이었다. 그는 감리교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의 형인 존 웨슬리 목사와 함께 순회설교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선한 군병으로서 고난과 박해와 수모를 견뎠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 크게 헌신하여 이 나라에 최초로 감리교 모임들을 만들었다. 그리스도인 시인으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영어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찬송가로 교훈과 위로를 전했다. 그는 1707년 12월 18일에 태어나 1788년 3월 29일에 죽었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고 경건하게 믿었으며, 영국교회의 진실한 친구였다

촬스웨슬리가 회심한 John Bray’s House

촬스는 존 웨슬리보다 3일 앞서 회심하였는데 찰스 웨슬리의 회심장소는 Mr. Bray의 집(John Bray’s House)이다

1738년 5월 21일, 아픔으로부터 회복하는 동안의 런던에서 그는 발견했다. 그와 그의 형 존이 그토록 오래 오래 찾아왔었던 것을 그는 드디어 찾았던 것이다. ‘나는 찾았다 내 자신이 하나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소망 안에서 기쁨에 넘쳤다.’ 수일 내로 그는 찬송가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특출한 재능을 발견하였다. 이 회심의 경험 이후 쓴 그의 첫 찬송은 이렇다: -나의 경이로운 영혼이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내가 어떻게 내 모두를 하늘에 열망할까요? 한 노예였던 내가 죽음과 죄로부터 구원을 받다니,  영원한 불구덩이에서 불타던 막대기가 꺼내어져 구원을 받다니,  아 어찌하면 그만한 승리의 개가를 다 표현하여 올릴 수 있으리요,  혹은 나의 이 위대한 구세주께 찬양을 어찌다 노래할 수 있으리요? 아무리 찬양을 많이 올린다 해도 그 높으신 구원의 은총에 까지 올라가기란 너무너무 부족하기만한 그 구원의 경이로움이란. 1749년에 42세의 나이로 찰스는 20세의 사라와 결혼하였다. 결혼후 처음 4년 동안 그들은 함께 여행하며, 찰스는 설교했다. 그의 형처럼 전국을 다니며 순회설교를 하였다. 영감이 폭발할 때, 그는 펜! 종이! 펜! 종이! 하며 소리치며 공부방으로 뛰쳐갔다

감리교 센트럴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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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 statue in Methodist Central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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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Central Method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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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Central Method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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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Central Method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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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Central Method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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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웨슬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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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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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감리교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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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기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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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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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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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무덤(웨슬리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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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생가내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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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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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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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채플앞 동상(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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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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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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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채플

장재웅 목사 “런던 웨슬리 생가 및 채플 방문 사진”  (아멘넷 기사)

정보ㆍ2012-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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