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말리엘의 변호 사도행전 5:33-42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 교회는 갈수록 흥왕했습니다. 사도들은 날마다 힘 있게 복음을 증거 하였고, 성도들은 날마다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로 인해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만큼 사탄도 역사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의 역사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역사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두 번째로 잡아들여 심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도리어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아예 없애버려야겠다고 독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사도들을 돕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며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이었습니다. 그는 관대하고도 이치에 타당한 말로 중재 역할을 하여 사도들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크게 분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저희들은 구주 예수님을 죽였다는 죄책에 사로잡히는 대신에 자기들이 구주를 죽인 반역자로 규정받은데 대해 격노했습니다.

저희들이 사도들을 죽이려 한 것을 심리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데 대한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잘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더욱이 사도들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뭔가 잘못된 일 같았습니다.

이제라도 바른 자세를 취하고자 한다면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에게는 회개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가책 의식이 역작용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0-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사도들에게 박해가 있을 것을 미리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몰랐고 그래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이후에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악인은 회개해야 할 때에 도리어 노여워하고 반항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없애버리려고 할 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만류했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 바울의 스승으로서 당대 석학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 교육 받았던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가말리엘을 소개하면서 바리새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외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고,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백성들이 율법 준수를 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지 못한다고 하여 매우 업신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백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외식하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달리 매우 경건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어서 백성들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가 바리새파의 양대 세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힐렐파는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인 반면 샴마이파는 보수적이었습니다. 이 두 학파는 율법 해석 문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입문한 랍비 가말리엘은 힐렐의 손자로 그 당시 힐렐파를 이끄는 석학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비록 온건한 것으로 소문난 힐렐파였으나 율법을 지키는 일과 전통을 존중하는 점에서는 엄격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무척 공평하고 독실한 인물이었고 역사적인 상황에도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산헤드린에도 세력을 가지고 있는 모든 국민에게 존경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에 앞서 사도들을 잠시 밖에 나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산헤드린 회원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려는 조치였습니다.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가말리엘은 말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유대인의 영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말리엘은 흥분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부른 것은 영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솔한 행동을 하면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조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것은 남을 탓하고 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험악한 공회의 분위기에서 그런 거슬리는 말을 발언을 하는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36-37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다 흩어졌느니라

가말리엘은 자신의 논설을 펴기 위해 두 가지 전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드다라는 사람의 예이고, 둘째는 갈릴리의 유다라는 사람의 예입니다. 이 두 사람은 로마에 협조하는 것은 결국 사탄에게 협조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과 저항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고 종교적 거룩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역부족으로 로마군에 의하여 진압이 되고 두 사람은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38-39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가 하노라 하니

가말리엘은 두 가지의 전례를 소개한 후 결론적인 말을 했습니다. 사도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서 난 것이면 자연히 무너지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우리가 손을 대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않는 일들은 가만두어도 저절로 해결될 것이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없고, 만약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이라면 더더구나 그 일에 대적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추진하는 어떤 일들에 대하여 내 생각과 좀 다르다고 해서 반대하며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을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역시 가말리엘은 당시 최고의 석학답게 지혜가 있었고 바르게 판단했습니다. 사도들을 박해하다가 자칫 하나님을 대적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옳은 생각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율법 교사답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람을 관용하며 감정을 억제하는 신중한 태도로 사건에 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공회원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공회원들은 가말리엘의 논리적인 말에 설득되어 그의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때린 후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놓아 주었습니다. 놓아주려면 순순히 놓아 주어야 하는데 저희들은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마음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세 갈래의 가죽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범죄자를 때렸는데 서른아홉 번으로 제한했습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에게 가해진 채찍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이 공회 앞을 떠나면서 기뻐한 것은 석방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은 일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혹독한 매를 맞고 핍박받는 것을 기뻐하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욕당함은 하나님 앞에서 사도된 자격을 받는 것으로 믿고 기뻐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22-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살이 찢어지도록 맞아도 기뻤고, 온 몸이 멍이 들어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기뻐했던 베드로는 훗날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왜 복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위로도 크고, 상급도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는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공회에서 나온 사도들은 날마다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 숨어서가 아니라 제사장들이 모이는 성전에서 당당히 가르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급성장 비결이었으며,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위력 있는 신앙의 비결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가르치고 전도한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람들이 무시했던 나사렛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목할 말씀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니라’는 것입니다. 잠깐 하다가 만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초대교회의 이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래서 어렵고, 힘들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이 지극히 미미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수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미한 것이라도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복음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을지라도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속적으로 항상 힘써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헤드린이 내리는 경고와 채찍질 형벌로도 사도들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고난당함으로 인해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인답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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