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영성과 오해 <사순절은 누구의 계절이었는가>

사순절 영성과 오해
<사순절은 누구의 계절이었는가>

사순절 하면 금식이다. 기도와 절제, 자기 성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이 시기를 ‘이미 믿는 사람들의 영적 점검 기간’으로 이해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새벽기도를 한 시간 더 앞당기고, 육식을 줄이고, SNS를 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사순절의 표준 프로그램이 되었다. 교회 게시판에는 ‘사순절 40일 묵상집’이 걸리고, 수요 예배에서는 목사가 “이 기간만큼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라고 권면한다. 기존 성도들의 영적 근육을 단련하는 계절이야말로 사순절에 대한 우리의 표준적 이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반쪽짜리 그림에 불과하다.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순절의 주인공은 기존 신자가 아니었다. 이 계절의 정중앙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catechumen)’들이었다. 사순절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성찰’이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마지막 준비’를 위해 존재했다. 이 사실 하나가 우리가 알던 사순절의 풍경을 통째로 바꾸어버린다.

3세기 로마의 히폴리투스가 남긴 《사도전승》은 이 과정을 놀라울 만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비신자들은 통상 3년간 말씀을 들어야 했다. “예비신자는 3년 동안 말씀을 들으라. 그러나 열심이 있고 잘 인내하는 자라면, 기간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실만을 살필 것이다” (Hippolytus, Apostolic Tradition 17.1–2, c. 215). 3년이라는 시간은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다. 이 기간은 예비신자가 단지 교리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바뀌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엘비라 공의회(Council of Elvira, c. 305)는 이 기간을 2년으로 규정했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칙법은 이를 법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긴 준비 기간의 끝에, 사순절이 놓여 있었다. ‘지원자(competentes)’ 혹은 ‘선택된 자(electi)’라 불린 최종 세례 후보 선발자들은 사순절 첫날부터 집중적인 마지막 훈련에 돌입했다. 세례를 받기 직전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히폴리투스는 이 단계의 심사 기준을 이렇게 적었다. “세례를 받을 자들을 선발할 때, 그들의 삶을 심사하라. 예비신자로서 절제하며 살았는지, 과부를 돌보았는지, 병자를 방문했는지, 모든 선한 일에 힘썼는지를 살피라. 그들을 데려온 보증인이 ‘이 사람은 그렇게 살았습니다’라고 증언하면, 그제야 복음을 듣게 하라” (Hippolytus, Apostolic Tradition 20.1–2). 신앙고백이 아니라 삶의 궤적이 먼저였다.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세례의 자격이었다.

4세기에 이르면, 이 과정은 사순절이라는 전례적 시간 안에 한층 정교하게 편입된다. 에게리아라는 스페인(혹은 갈리아) 출신 수녀가 381년경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남긴 여행기가 당시 사순절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하루 전, 세례를 원하는 이들은 사제에게 자기 이름을 등록해야 했다 (Egeria, Itinerarium Egeriae 45.1, c. 381–384). 다음 날 주교가 성직자들을 대동하고 순교자 교회(Martyrium)에 나타나면, 후보자들은 가족과 함께 한 명씩 주교 앞에 섰다. 주교는 후보자의 이웃과 가족에게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물었다. 주교가 만족할 답이 돌아오면 드디어 세례자 명단에 이름이 기록되었고, 만족하지 못하면 돌려보냈다. 보증인(교회의 후견인: 대부 대모) 없이는 아무도 세례 후보가 될 수 없었다 (Egeria, Itinerarium Egeriae 45.2–4).

이 심사를 통과한 뒤부터가 진짜 사순절이었다. 매일 아침, 부활 교회(Anastasis)에서의 새벽 예배가 끝나면, 주교의 의자가 순교자 교회 한가운데 놓였다. 예비신자들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주교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했는데, 문자적 의미로 시작해 영적 의미로 가르쳤다 (Egeria, Itinerarium Egeriae 46.1–2). 사순절 40일 내내, 그것도 매일 아침마다 이 일은 계속되었다. 이것이 사순절의 원형이다. 성찰이 아니라 교육이었고, 금식이 아니라 입문이었다.

환대의 계절, 잃어버린 문법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전복이 일어난다. 사순절의 원래 주인공이 ‘교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었다면, 사순절의 기본값은 자기 성찰이 아니라 ‘환대’가 된다.

예루살렘의 키릴루스가 350년경 예비신자들에게 전한 《교리교육 강의》의 서문은 이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미 복됨의 향기가 너희 위에 있도다, 곧 조명을 받을 자들이여. 이미 너희는 영적인 꽃들을 모으고 있으니, 하늘의 면류관을 엮으려 함이라. 이미 성령의 향기가 너희에게 불어왔도다” (Cyril of Jerusalem, Catechetical Lectures, Procatechesis 1, c. 350). 이것은 자기 부정의 언어가 아니라,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건네는 축복의 언어다. 예비신자들은 ‘빛을 받을 자들(photizomenoi, φωτιζόμενοι)’이라 불렸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이미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키릴루스의 강의는 단순한 교리 전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치밀하게 설계된 비밀 입문 과정이었다. 사순절 동안 예비신자들은 처음으로 신조/신경(Creed)의 내용을 들었다. 주교가 신조를 구두로 ‘전달(traditio symboli)’하면, 예비신자들은 그것을 대부모의 도움으로 외운 뒤, 며칠 후 주교 앞에서 암송으로 ‘되돌려 주어야(redditio symboli)’ 했다 (Cyril of Jerusalem, Catechetical Lectures 5.12; cf. Augustine, Sermones 56–59, “De Oratione Dominica ad competentes”). 신조를 글로 기록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오직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졌기에 신조는 곧 ‘비밀의 규율(disciplina arcani)’로 통했다. 이런 모습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교회의 핵심 고백을 함부로 노출하지 않으려는 초대교회의 조심스러운 태도라 할 수 있다.

기존 신자들의 역할도 오늘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미 교인이 된 사람들은 사순절 기간 동안 자기 죄를 반성하는 데 몰두했던 게 아니라, 예비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보증인이 되고, 그들의 삶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순절의 금식과 기도는 ‘자기 안으로’ 향한 것이기 이전에,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진 것이었다. 공동체 전체가 새로운 지체를 맞이하기 위해 함께 몸을 낮추는 시간, 그것이 오늘날 사순절의 잃어버린 근본 정신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 교회의 사순절 풍경은 기묘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수십 년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기 성찰에 매진하는 동안, 정작 ‘교회 밖의 사람들’은 사순절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초대교회에서 사순절의 주인공이었던 바로 그 사람들, 교회 문턱에 서 있는 사람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순절이 ‘교회 안 사람들의 내적 수련’으로만 운영되는 한, 이 계절은 가장 중요한 절반을 잃은 셈이다. 초대교회의 사순절은 기존 성도의 금식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가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는 환대의 프로토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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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교회의 사순절은 대체로 ‘내가 얼마나 절제할 수 있는가’의 시험으로 축소되어 있다. 커피를 끊고, 유튜브를 줄이고, 새벽기도를 늘린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순절의 전부라면, 우리는 이 계절의 원래 무게를 한참 가볍게 만든 것이다. 4세기 안티오키아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미 비슷한 한탄을 남긴 바 있다. “나는 세례를 받은 뒤 세례받지 않은 자보다 더 방종하게 사는 많은 이들을 본다. 그들의 삶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 (John Chrysostom, In s. Matthaei evangelium 4.14). 세례 이후의 삶이 세례 이전과 다르지 않다면, 사순절의 준비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사순절이 정말로 묻는 질문은 이것 아닐까. ‘당신의 교회는 올해 부활절에 누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순절 보라색은 내 영혼의 무게가 아니라, 교회 문 밖에 서 있는 누군가의 무게를 짊어지라는 표식이다.

글. 최주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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