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 고뇌의 밤을 침상에서 울며 지새워보지 않은 사람은 하늘의 권능들을 알지 못한다.”
사람은 슬프면 웁니다. 그러나 시편 80편은 눈물을 흘린다고 하지 않고, 눈물을 먹고 마신다고 말합니다. ‘눈물의 양식’은 히브리어로 ‘눈물의 빵’입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얼마나 오래 울었으면 눈물이 음식이 되었을까. 시편 80편은 한 개인의 슬픔보다 더 큰 아픔을 품고 있습니다. 나라가 흔들리고 공동체가 무너졌으며, 원수들의 조롱까지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1. 눈물이 일상이 되었다
시편 23편의 양들이 푸른 풀을 먹었다면, 시편 80편의 백성은 눈물의 빵을 먹고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목자라 부르지만 풍경은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안하게 노래하기보다 절박하게 외칩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1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목자라 부릅니다. 이것이 시편 80편의 믿음입니다.
2. “언제까지입니까?”
그들은 묻습니다.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4절)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성경은 이 당돌한 질문을 지워 버리지 않습는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께 따져 묻지도 않습는다. 이 탄식은 아직 하나님을 놓을 수 없다는 믿음이 숨어 있습니다. 탄식은 믿음의 반대말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는 믿음의 가장 아픈 언어입니다. 상처를 감추지 않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어놓는 기도입니다.
3.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
시편에는 세 번 같은 기도가 후렴처럼 반복됩니다.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3, 7, 19절)
시인은 먼저 “우리를 돌이키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시 주님께로 돌이키시고,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시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 안에는 회개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돌이킴의 주도권도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임재와 은총을 뜻합니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고통의 중단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들을 바라보시고 함께 계셔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양들의 눈물을 멀찍이 내려다보지 않으셨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겟세마네와 십자가에서 인간의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바울은 고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을 보았습니다.
시편의 백성이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얼굴빛을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에서 바라봅니다.
오늘도 눈물의 빵을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너무 쉽게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곁에 머물며 함께 울고, 때로는 함께 통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여, 우리 외침에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주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기도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하나님,
눈물이 양식처럼 느껴지는 날에도 주님께 부르짖게 하소서.
침묵처럼 느껴지는 시간에도 “언제까지입니까?”라고 주님께 묻게 하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시고,
지친 영혼과 상처 입은 공동체를 다시 살려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