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위에서 부르는 노래
시79: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Rhetoric)’에 제시한 설득의 3대 요소는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 입니다. 그 중 로고스는 논리적인 근거, 사실에 기반하여 상대방의 이성을 설득하는 힘입니다.
주장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와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러한 ‘로고스’의 방식으로 복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두번째 요소인 에토스(Ethos)는 말하는 사람의 도덕성, 신뢰감, 호감도, 전문성을 뜻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 자체를 믿을 수 없다면 설득은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요소인 파토스는 상대방의 마음과 감정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파토스는 청중의 기쁨, 슬픔, 동정심, 혹은 두려움을 자극하여 행동을 이끌어내는 불씨 역할을 합니다.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작품 속에서 슬픔이나 연민, 비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가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은 행동하지 않습니다.
시편을 묵상하면 유대인들의 정서에 담겨 있는 강한 파토스(pathos)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 ‘경험’, ‘감성’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삽의 시편 중에서도 바벨론 포로기를 배경으로 하는 ‘탄식시’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온통 아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이유는, 당시 유다 백성들이 겪은 사건이 단순한 국가적 패배를 넘어 그들의 종교적, 정신적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종말론적 재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울부짖으며 고통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벨론의 침공이 무자비한 학살을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그들의 피를 물같이 흘렸으나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2-3절).
죽임당한 이들의 시신이 거리에 방치되어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는 비참한 현실, 그리고 주변 이방 나라(에돔)들이 그 모습을 보며 “너희를 구원한다던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며 조롱하고 비웃는 모욕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더 절망감에 빠진 이유는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위기 때마다 선지자가 나타나 영적 방향을 제시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포로기에는 “우리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시 74:9)라고 탄식합니다. 가장 큰 아픔은 육체적 고통이나 재산의 상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라는 영적 위기였습니다
그 두려움이 시 전체를 고통으로 물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식은 단순히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신앙에서 고통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다 쏟아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신뢰가 역설적으로 남아있음을 뜻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께 울부짖는 이유는, “오직 이 아픔을 해결하고 우리를 회복시키실 분도 하나님뿐”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아픔과 고통의 노래는 절망의 끝에서 붙잡는 마지막 신앙의 끈이었습니다.
삶의 환경이 완전히 파괴되었을지라도 하나님과 나 사이의 목자와 양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불신앙과 실패의 잿더미 위에서도 “나는 여전히 주님의 양입니다”라는 고백이 있다면, 그 삶은 반드시 감사와 찬송으로 회복됩니다.
어느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평생을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오던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기 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자녀들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고, 남편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왜 제 노년에 이런 참혹한 고난을 주십니까?” 시편 79편의 아삽처럼, 그녀의 마음은 원망의 탄식만 가득했습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며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없다”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창밖으로 밝아오는 새벽빛을 보며 문득 마음에 성령님의 세밀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딸아, 네가 아파서 신음하는 이 침상 곁에 내가 단 한 순간도 너를 떠나지 않고 함께 울고 있었단다.” 그 순간, 권사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을 덮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비록 암 세포는 여전히 몸에 남아있고 육체는 파리해졌지만, 영혼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항암 병동에서 입을 열어 조용히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찬송은 항암 병동 옆 침대의 다른 환우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병동 전체에 소망의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간증합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가장 어두운 잿더미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송을 빚어내셨습니다. 이제 제게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오직 주님의 영광일 뿐입니다.”
탄식이 찬송이 되는 비결은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환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나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옮겨질 때 일어납니다. 아삽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영원히 주께 감사하리이다
지금 이 시간 오래 된 한국 복음성가 ‘사나 죽으나’를 들으면서 기도하기 원합니다. 잿더미 위에서 부르는 찬양이요 사도 바울의 고백(롬14:8)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By Kenny Rhee




